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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 리뷰 및 후기 [리뷰어] 기호학과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콘셉트'
  • 2014-07-07 15: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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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신나요
 

콘셉트의 기본 콘셉트
 
구조 언어학이라는 학문 영역의 기초를 세운 스위스 출신의 명성 있는 언어학자 소쉬르. 그의 이론 중 가장 자주 언급되는 개념을 꼽자면 시니피앙(signifiant;기표記標)과 시니피에(signifier;記意)를 들 수 있겠습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기호학에서 주로 거론되는데, 하나의 기호(글자이든, 그림이든, 소리이든)는 겉으로 보이거나 들리는 형태로서의 시니피앙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로서의 시니피에의 결합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배]나 [ship]이나 [船]이라는 단어들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의미가 있겠지요. 이때 [배], [ship], [船]이라는 단어가 시니피앙이고,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그 어떤 것(국어사전을 참조하자면 ‘사람이나 짐 따위를 싣고 물 위로 떠다니도록 나무나 쇠로 만든 물건’)이 시니피에입니다. 더욱 쉽게 설명하기 위해 빈번히 사용되는 예로, 도로의 신호등에 들어오는 [빨간불]이 시니피앙, 즉 기표라면 ‘정지’라는 뜻이 시니피에, 즉 기의가 됩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일대일 대응이냐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를테면 신호등의 [빨간색]이 ‘정지’라고 한다면 비상등의 [빨간색]은 ‘위험, 주의’를 뜻하지요. [배]라는 단어는 “제주도에 갈 때에는 [배] 타고 간다”라고 할 때에는 ‘선박’이라는 의미를, “[배]가 아픈 걸 보니 체했나 보다”라고 할 때에는 ‘복부’라는 의미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에서는 ‘과실’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동일한 시니피앙도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시니피에를 지닐 수 있으며,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배배배.jpg

 
 
이렇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연결이 사람들끼리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호등에서 [빨간불]이 들어오면 ‘멈춘다’는 개념은 사람들 사이의 합의이죠. 사실 그 불이 [빨간색]이 아니라 [녹색]이었을 수도 있고, [보라색]이었을 수도 있고, [주황색]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선박’이라는 의미를 지닌 어휘로 우리는 [배]를 사용하고 있지만, 언어를 처음 사용할 적에 사람들끼리 결정하기를 [새]라고 부르자고 했다면 우리는 ‘선박’을 [새]라고 불렀을 겁니다. 혹은 [거미]라거나, [강]이라거나. 무엇으로 부르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자의성(恣意性)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누군가가 “오늘부터 ‘선박’은 [배]가 아니라 [다리]라고 부르겠어!”라고 선언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불가능하죠. 한 개인이 ‘선박’-[다리]의 연결을 일방적으로 선언한다고 해서 지금까지 ‘선박’-[배]로 연결하던 사람들이 모두 당장 알아듣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연결이 합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건, 다시 말해 내 임의대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연결 구도를 바꾼다면 그에 따르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않는 이상 남들과 소통할 수 없게 된다는 겁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 내에서는 언어의 [기호]와 ‘의미’를 약속된 바에 따라 써야 한다는 것을 사회성(社會性)이라고 합니다.
 
기호의 ‘콘셉트’를 찾아라
 
길고 딱딱한 기호학적 이야기를 길게 풀었는데, 보드게임 콘셉트는 상기에서 이야기한 기호학적 특성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게임입니다. 콘셉트의 보드판에는 다양한 그림 기호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기호들은 각각이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다른 기호들과의 결합으로 더욱 구체적이면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크기변환_P140707132912.JPG
 
위 그림에서 기호 1(위)은 물, 액체, 비, 흐르는 것 등 수많은 의미를 지닙니다. 기호 2(좌측 아래) 역시 먹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누군가는 식사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회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기호 3(우측 아래)의 의미는 대부분이 아마 ‘흰색’이라고 이해할 겁니다. 기호 1과 2가 합쳐지면 ‘먹을 수 있는 액체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의미는 많네요. 물, 술, 콜라, 사이다, 환타 등등. 여기에 ‘흰색’이 결합되면 훨씬 더 한정되면서, 마침내 정답인 ‘우유’가 나옵니다. 그러나 만약 설명해야 하는 관념이 ‘우유’가 아니라 ‘바나나우유’였다면, 저 위 세 개의 기호를 통해 ‘우유’까지 설명했으니 다른 기호들을 동원하여 ‘바나나’도 설명해야 합니다.
 
플레이어들은 돌아가면서 출제자가 되고, 출제자는 문제 카드에 나와 있는 단어를 사람들이 맞출 수 있도록 이 기호들을 조합해 설명합니다. 그런데 기호와 의미의 결합이 자의적(임의의 연결)이기 때문에 바야흐로 게임이 성립됩니다. 각 기호들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러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닐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유’를 설명하려면 이 기호들을 서로 결합시켜 그 의미를 한정시켜야 하죠. ‘물은 물인데 마시는 물’이고 ‘마시는 물인데 흰 거’입니다. ‘마시는 흰 물인데 과일 맛’이고, ‘과일 맛인데 그 과일은 노란 과일’이고 ‘노란 과일 중에 원숭이가 먹는 과일’이죠. 몇 개의 기호가 결합되었나 볼까요? ‘물’, ‘먹는다’, ‘흰색’, ‘열매’, ‘노란색’, ‘먹는다’, ‘원숭이’. 그런데 찾아보니 ‘동물’이라는 기호는 있어도 ‘원숭이’라는 기호에 없습니다. 이런. 다시 원숭이도 설명해야 하겠군요.
 
고맙게도 우리에겐 가장 압축성과 지시성이 높은 기호인 언어가 있어서 이렇게 복잡한 것을 단 한 마디인 ‘바나나우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콘셉트는 이 과정을 정반대로 뒤집었지요. 하나의 개념을 사회적인 합의가 없는 기호들로 설명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하여, 무작위적으로 연결되는 기호의 의미들 속에서 출제자가 각 기호에 어떤 시니피에를 연결시켰을까를 먼저 읽어내는 쪽이 승리합니다.
 

언어생활이 게임이 된다, ‘콘셉트’
 
[설명1]
크기변환_P140707132912B.JPG
 
[설명2]
크기변환_P140707132912A.JPG
 
[설명3]
크기변환_P140707132912C.JPG
 
위 그림의 정답은 무엇일까요? 맞히기 위해 우선 각 설명의 의미를 해석해 봅시다.
[설명1] 제목, 영화, 검다, 희다 : 흑백영화의 제목
[설명2] 일꾼, 도시, 기계(톱니바퀴) : 도시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노동자
[설명3] 남자, 작다, 코, 검정, 꼬불꼬불한 것(가닥) : 콧수염이 난 작은 남자가 주인공
정답은 ?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입니다.
 
크기변환_movie_imageCAAY3ME2.jpg
 

처음 기호만 접했을 때의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각 기호(=시니피앙)의 의미(=시니피에)가 너무나 다양하며, 각 기호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형태는 그보다 더욱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설명1]을 ‘흑백영화의 제목’이라고 이해하면 적절하겠지만 ‘영화 제목이 흑과 백’이라고 이해하면 이때부터 슬슬 판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설명2] 또한 ‘일꾼이 마을에서 기계를 돌린다’고 읽힐 위험이 농후합니다. 이렇듯 다양하게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가운데 플레이어들은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각 기호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 결합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뒤따르죠.
 
출제자 역시 상당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호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 엉뚱하게 의미가 한정되어 버려서도 안 되고, 설명이 충실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람들이 알아서 정답을 맞히기를 바랄 수도 없지요. 출제자들은 플레이어의 생각을 예측해야만 합니다. 이 기호를 보면 적어도 이 정도쯤은 생각할 것이라는, 말하자면 그 기호의 의미에 대한 사회적 약속을 예상하는 겁니다.
 
이 과정은 우리의 의사소통 과정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언어 또한 기호 체계이며, 우리는 언제나 보다 적절한, 즉 좀 더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표현을 찾기 위해 애를 쓰지요. 말하는 사람은 상대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골라서 조직하고, 듣는 사람은 자신이 들은 말을 통해 그 속에 숨은 의미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콘셉트를 하는 동안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의사소통 활동에 더욱 자연스럽게 다가가게 됩니다. ‘모던타임즈’라는 단어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다각도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위에서는 영화의 특징, 주제, 주연배우의 특징의 세 가지로 설명했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중 사람들과 가장 잘 소통할 만한 방법을 찾아내면서 게임판 위의 117개의 기호들 중에 적합한 몇 가지만을 골라내는 작업입니다.
 
 
상대의 표현을 이해하는 시간
 
콘셉트의 문제 카드 한 장에는 아홉 가지 단어가 적혀 있습니다. 3단계의 난이도로 나누어진 카드 상의 어휘나 개념들은 현지화가 잘 되어 있는데, 상급 난이도 문제의 용어들은 알 만한 사람은 알고 모를 만한 사람은 모를 것들도 있습니다. '파이트 클럽', '크리스틴 스튜어트', '아임 유어 파더'는 적어도 부모가 초등학생 아이와 함께 풀 만한 건 못 됩니다. '방망이 깎던 노인'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러니 아이들과 하려면 중급 난이도 이상은 피하는 게 맞습니다. 사실 더 나아간다면 문제 카드는 옵션에 불과합니다. 어떤 개념어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이 기호판의 기호들로 거의 다 설명할 수 있을 듯합니다.
 
콘셉트 게임의 매뉴얼에는 작가의 의견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는 ‘점수를 얻는 것을 생략하고 진행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순수하게 힌트를 만들고 맞히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지요. 게임을 경험하고 실제로 느낀 바가 그러했습니다. 점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자기 방식대로 이 어휘를 설명하고 싶어했고, 남이 설명한 개념을 이해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게임은 매우 건전하고 훌륭한 게임입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바쁜 일상에 시달리다 서로간의 대화가 사라져버린 세태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 어떤 보드게임보다도 상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이 게임은, 보드게임의 장점이 사람과 사람의 대면이라고 보았을 때 그야말로 값진 게임이 아닐까 합니다.
크기변환_크기변환_conceptkr_thumb_70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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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Lv.1 엄동명
    • 2014-07-08 00:17:46

    좋은게임이지만 기호들이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았던것으로 기억해요
    • 2014-07-08 10:46:28

    칼럼인데요 이건 ㄷㄷㄷㄷ 잘읽엇습니다~~
    • 관리자 신나요
    • 2014-07-09 09:23:06

    엄동명 // 저 개인적으로는 기호는 그냥 보편적인 형태였던 느낌입니다. 카드에 나오는 문제 단어나 구문들 같은 경우에는 그런 것들이 좀 있었지만요. afterdai // 감사합니다. ㅎ 제가 전공이 국어였기에 보드게임 속에서 국어에 관련된 원리를 보게 되더라고요. 전공이 수학이나 과학이었으면 더 많이 찾았을지도요? ㅋ
    • Lv.2 germ
    • 2014-07-09 20:16:27

    콘셉트 한 번 해보고 싶어요 ㅋㅋ 잘 보고 갑니다~
    • 2014-07-09 23:42:34

    몰입되게 잘쓰셨네요~~
    • 관리자 신나요
    • 2014-07-10 08:26:47

    germ // 콘셉트 재미있어요. 저도 처음 기대 내지 예상했던 것보다 훌륭했습니다. 코프luv // 감사합니다~
    • Lv.1 아라꾸
    • 2014-07-10 16:43:07

    자신과 평소 생각이나 취향, 나이 등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해야 더 재미있을 것 같네요. ㅋㅋ
    • 관리자 신나요
    • 2014-07-11 08:21:56

    제가 부산에서 하는 모임에 초등학생 아이도 한 명 오는데, 확실히 이 아이는 잘 모르더라구요. ㅎ 그런데 평소 생각이나 취향의 일치도에 따라서 잘 맞는 부분은 딕싯보다는 나은 편이었습니다. 오히려 커플 둘이 설명하라고 붙여 놓았더니 서로 다르게 설명하려다가 서로 이게 맞네 틀렸네 하며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하며...... 이런 식으로 생각할 줄 몰랐다며...... ㅋㅋ
    • Lv.1
    • 2014-07-15 01:08:32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나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네요.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관리자 신나요
    • 2014-07-23 09:09:01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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